| 제목 | [평생학습타임즈 편집국장 김창엽 박사 칼럼-78] 새롭게 톺아보는 충(忠)·효(孝)·예(禮)의 뜻과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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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톺아보는 충(忠)·효(孝)·예(禮)의 뜻과 내용 김창엽(평생학습타임즈 편집국장, 한국평생교육실천전략연구소장) 인성을 기르기 위하여 충(忠)·효(孝)·예(禮)를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 부쩍 많아진다. 인성의 모든 것이 충(忠)·효(孝)·예(禮)인 듯 주장하는 경우조차 있다. 그런데 정작 충(忠)·효(孝)·예(禮)의 뜻과 내용에 대한 생각은 일천하다. 먼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충(忠)·효(孝)·예(禮)는 다음과 같다. 우선, 충(忠)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다. 나라를 다스려 우리를 보살피고 먹고살게 해주는 나랏님을 따르고 받드는 것, 거역하지 않는 것이 충(忠)이라고 인식한다. 다음, 효(孝)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 준 것을 보답하기 위해 하는 것이 효(孝)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예(禮)는 나이든 어른에게 하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나이든 사람에게 공경하고 따르는 것을 예(禮)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충(忠)·효(孝)·예(禮)는 인성 형성의 기반이 되고, 인간사회에 필요한 토대라고 제시된다. 이와 별도로 충(忠)·효(孝)·예(禮)를 통해 인성을 기를 수 있다고 보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다. 이는 인성을 가르쳐서 길러질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와 연결된다. 또는 인성과 충(忠)·효(孝)·예(禮)의 상관관계에 대한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충(忠)·효(孝)·예(禮)가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문화를 강제하고, 민주적 성품을 기르는 것을 방해하며, 인간의 평등적 상호관계 형성에 문제를 야기한다는 지적이 존재한다. 어느 관점이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기 전에 충(忠)·효(孝)·예(禮)에 대한 이해를 구체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무엇에 대한 판단을 하려면 그것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충(忠)·효(孝)·예(禮)의 뜻을 새롭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충(忠)의 의미를 새롭게 해야 한다. 충(忠)의 대상은 국가이다. 여기서 국가는 고대, 중세의 왕정시대의 국가를 일컫지 않는다. 인권, 자유, 평등, 박애 등을 기본 가치로 하고, 더불어 사는 시민사회를 유지하기위한 제도로서의 국가를 의미한다. 사람들의 삶의 평화와 인간화를 성취하기 위한 토대로서의 국가를 가리킨다. 국가에서 수행하는 일의 결과는 모든 시민에게 귀속되어야 한다. 국가는 말 그대로 공화(共和)체제로서 존재의의를 갖는다. 국가의 이러한 속성과 기능이 제대로 잘 발휘되도록 지켜보고 챙겨주고 필요한 경우 감시하고 견제해야 한다. 이것이 국가에 대한 충(忠)이다. 둘째, 효(孝)는 인간화와 연결되어 파악되어야 한다. 효를 ‘부모가 내게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는 관점에서 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기혼주의자의 경우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며, 직업을 가지게 되고 직장을 다니게 된다. 직장에서 인격적 대우를 받는 것은 녹록치 않다. 직장은 당사자를 인간이 아닌, 성과를 내기 위한 부속물, 그것도 유효기간이 있는 부품으로 여기기 일쑤이다. 부속물, 부품에게 인격적 대우를 할 필요가 없다. 이를 견디기 위해 “출근할 때 냉장고에 간과 쓸개를 넣어둔다.” 이 말이 농담일 수만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인정 받고, 그 어떤 존재에게는 절대적 의미와 가치가 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자식에게서이다. 자식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느끼고 삶의 기쁨을 얻는다. 하여 자식에게 정성을 쏟는 측면이 있다. 자식에게 100을 내면, 자식에게서 1,000을 받을 수 있다. 하여 효도를 계산적으로 할 것이 아니다. 부모가 내게 100을 주고 1,000을 가져갔으니 900을 내놓으라고 할 것인가…… ‘나’는 여러 관계와 가능성이 응축된 공(空) 또는 무(無)에서 부모에 의해 인간의 존재로 구체화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볼 때 현실에서 인간으로 되어가고, 더불어 사는 인간의 삶을 구현하는 것이 효도의 진짜 모습이 되겠다. 셋째, 예(禮)는 인간이 서로 존중하고 더불어 사는 방식을 이야기한다.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으면 감사를 드려야 한다. 스스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으로 보답을 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이 서로 존중하고 더불어 사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이 경우에 따라 보다 구체화 되고 인간이 올바르고 정확하게 따를 수 있도록 체화된 것이 예(禮)다.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며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식이 예(禮)다. 충(忠)·효(孝)·예(禮)의 뜻을 톺아보면 기존에 알고 있던, 또는 알았다고 생각하던 것과 차이가 있다. 이는 그동안 고개 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서 미처 그 뜻을 살펴보지 못했던 탓도 있고, 그 뜻과 내용을 잘못 배우고, 주입 받은 탓도 있다. 지금, 여기 충(忠)·효(孝)·예(禮)의 뜻과 내용을 제대로, 새롭게 톺아보면 충(忠)·효(孝)·예(禮)를 통해 해야 할 일이 지금과는 차원이 다르게 나타난다. 평생교육 영역에도 그동안 충(忠)·효(孝)·예(禮)라 할 만한 것들이 있었다. ‘HRD, 지속가능한 사회, 경쟁력과 직업능력 갖추기, 4차산업혁명과 직업’ 등이다. 이들은 모두 스스로가 ‘길이며,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지고지선이라고 웅변하고 있다. 이제 그 주장과 웅변 내용을 샅샅이 톺아볼 필요가 있다. 사람의 판단과 꿈꾸기를 마비시키는 주술적 성격이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평생교육의 정당성 위기가 닥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아픈 성찰과 통찰을 통해, 오랜 역사 과정 동안 문명사적 위기의 토대로 작동해온 교육이 이제 어떤 각성과 몸짓을 보여야 할지를 물어야 한다. <평생학습타임즈 – 김창엽 gksakel@hanmail.net> 출처 - 평생학습타임즈, 김진규IN특집칼럼, 20180523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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