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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평생학습타임즈 발행인 최운실 칼럼] 퇴근길 ‘학습 한잔’ 권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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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학습타임즈 발행인 최운실 칼럼] 퇴근길 ‘학습 한잔’ 권하는 사회

최운실(본지 발행인)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시대의 자화상 같은 독백들이 진하게 묻어나던 작품 하나가 오늘 문득 떠오른다. 1921년에 개벽에 발표되어 문단을 뜨겁게 달궜던 사실주의 작가 현진건님의 '술 권하는 사회'이다. 식민지 조선사회,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저항하지 못한 채 그저 술을 벗 삼아 주정꾼으로 살아가던 당시 지식인들의 나약함과 좌절, 그리고 고뇌와 애환을 녹여냈던 책이었다. 오랜 세월 기다리던 동경 유학생 남편이 돌아왔건만 허구한 날 만취해 들어오는 남편에게 아내가 애달게 묻던 말 "누가 술을 권하던 가요?".이어지는 남편의 푸념 섞인 답 "이 몹쓸 놈의 사회가 내게 술을 권했다오!". 시대를 넘어 아스라이 전해져 온다.



2018년 현진건님의 '술 권하는 사회'가 사라지고 있다. 술 대신 퇴근길 '배움'을 권하는 사회가 오고 있다. 저녁이 있는 삶을 구가하는 사람들의 선술집 술 한잔이 '배움 한잔'으로 채워지고 있다. 김난도 교수팀이 밝혔던 2018년 트렌드에 드러난 한국인의 새로운 삶의 가치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과 '가심비(가격대비 마음의 만족)', 그리고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이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지금 여기' 행복 리트머스 시험지들이다.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높은 교육열을 자부하는 대한민국이다. 국제회의에서 만나는 외국인들이 종종 묻는 말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정말 태어날 때 '공부'라고 외치며 태어나느냐는 농담 섞인 질문에서 '학습강국 학습민족'의 자부심을 만난다. 그 덕분인가? 얼마 전 대한민국평생학습대상을 거머쥔 경기도의 모 학습도시가 '퇴근 길, 배움 한 잔 어때요?'라는 슬로건으로 '퇴근학습길'이라는 이색적 주제를 내걸어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하루 하루 스트레스로 시들어 가는 직장인들의 애환을 술 대신 '공부'로 풀어보자는 유쾌한 발상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왁자지껄 퇴근 길 삼삼오오 직장인들이 모인다. 진한 소주 한잔 대신 신선하고 향기로운 '학습'을 마신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든 중장년의 직장인들이 골목길 '길거리학습관'과 우리동네 학습장 마을학교에 빼곡히 모여드는 진풍경을 자아낸다. 지하철 역사(驛舍)와 인근의 학습공방, 카페. 병원, 책방 등이 모두 저녁학교로 변신한다. 주말에는 이들이 토요학교와 일요학교로 변신한다. 미국의 개척시대를 열었던 프론티어들의 일요학교가 연상된다.



우리 동네 학습장에서 펼쳐지는 '학습마실' 또한 흥미롭다. 오래 전 이웃집 아낙네들의 애환이 서려 있던 동네 마실이 어느새 '학습마실'로 이름을 바꾸었다. 길거리 학습관마다 공부하는 '학습마실꾼'들로 북적대는 모습이 일상의 학습으로 다가온다. 구석구석 동네 한 바퀴 학습여행길을 만들어 잊혀졌던 마을 학습공간을 찾아내어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사람들, 그들이 도시를 움직이고 있다. 숨죽이며 침잠해 있던 도시의 새벽들이 깨어난다. 마을이 사람들로 북적이며 와글와글 새롭게 태어난다. 이태리 피렌체가(家)의 르네상스가 목하 2018년 대한민국에서 다시 부활하고 있는 듯하다. 오늘따라 그 대단한 세기의 스티브 잡스가 하나도 부럽지 않다.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후에야, 마지막 강이 더럽혀진 후에야, 마지막 남은 물고기가 잡힌 후에야, 그대들은 깨닫게 되리라.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북미 대륙 최북단에 사는 인디언 크리족의 추장 시애틀이 전하는 말을 떠올려 본다.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자연과 어우러져 사는 크리족이 '만족을 모르는 시대'에 전하는 울림의 전언이다. 인디언들이 전하는 지혜의 잠언 묵상을 거울로 삼아, 각자도생의 시대에 공부에서 답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삶의 이유와 존재의 의미를 '지적 대화'에서 찾는 사람들이 증가한다.



아래로 자라는 나무, 뿌리 깊은 나무, 시민들 스스로 일궈가는 '무한성장'이 기대된다. 다음 시대를 열어 갈 사람들이다. 시대의 '밑둥'이 될 사람들이 하나 둘 학습이란 이름으로 모이기 시작한다. 퇴근길 '배움 한잔' 기울이며 삶의 소소한 행복을 만끽하는 그들의 '저녁'이 더 없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가히 어느 '왕의 만찬'에 이를 비할까. 학습마실을 즐기며 '공부하는 이웃'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자신을 찍은 도끼에 맞아도 향을 묻히는 향나무처럼 향기로운 사람들, 그들의 학습마실에 기꺼이 동행하고 싶어진다.



*본 글은 본지 발행인 최운실이 인천일보 2018년 6월 8일에 기고한 글을 공유한 것입니다.



<평생학습타임즈 – 타임즈편집국 lltimes@lltimes.kr>

출처 - 평생학습타임즈, 김진규IN칼럼, 특집칼럼, 201807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