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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평생학습타임즈 편집국장 김창엽 박사 칼럼-89] 나비의 본모습 알기, 해부를 통해서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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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학습타임즈 편집국장 김창엽 박사 칼럼-89]
나비의 본모습 알기, 해부를 통해서 아니면…

김창엽(본지 편집국장, 한국평생교육실천전략연구소장)

염과 상관없이 부쩍 잠자리가 많아졌다. 절기로 보면 입추가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다. 이즈음에 나비도 자주 볼 수 있어야 하는 데, 쉽지 않다. 수년전만 해도 지천으로 나비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나비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본다면, 나비를 잡아 해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신체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고, 움직임은 어떤 신경과 근육체제에 의해 이루어지며, 생물학적 수명은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이유이다.


이런 해부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나비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 나비의 날개 펄럭임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이고, 꿀을 빠는 동작은 어떤 기관의 어떤 작용을 거쳐 이루어진다는 것을 떠올릴 수도 있다. 꽃가루를 몸에 붙여 과일나무의 수정이 이루어지게 한다는 매우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판단도 가능하다.


이것만으로 나비의 모든 것을 안다고 하기에는 못내 아쉽다. 사람과의 관계를 과일나무 수정이라는 맥락에서만 바라보는 것도 마뜩치 않다. 과학적 지식과 판단에만 근거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서양의 경우 르네상스 이후 실증되지 않는 것은 부정함으로써 중세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극복하였다. 이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철옹성을 쌓아갔으며, 인간 이성의 끝없는 발달을 기대하고 부르댔다. 이 경향은 전세계로 주입되고 파급되었다. 그러나 사람과 삶은 결코 과학적 실증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흔히 말하는 과학적 이성, 실용주의는 이를 간과하고 또는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스스로 기준을 설정하고 제도화하여 모든 것을 이 기준과 제도에 속하게 한다. 마치 지나가던 사람을 잡아 눕게 한 후 모자라면 늘려 죽이고, 남으면 잘라 죽이며, 딱 맞으면 눈을 멀게 하여 따르게 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쇠침대’처럼 행사한다.


교육이 제도화되면 얻는 것도 있지만 잃는 것도 상당하다. 예를 들어, 평생교육에서 학점은행제는 생활세계에서의 학습도 의미와 가치가 있고, 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도화된 것이다. 그 주장은 그럴 듯 하였으나, 제도화의 결과로 학점인정 과목으로 승인되지 못한 학습은 그 의미와 가치가 오히려 배제되었다. 교육이 효과주의와 실용성의 시각에 매몰되는 것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효과성과 실용성 외의 것은 무시 내지 경시되고 있다.


교육이 현상의 인간이 점점 인간화되는 과정이라는 것이 잊혀지고 있다. 교육은 인력공급제도가 아니며, 교육기관은 직업훈련소 내지는 인력공급센터가 아니라는 것을 놓치고 있다. 꽃 사이를 너울너울 넘나드는 움직임에서 나비의 본모습을 보아야 하는 까닭이다.



<평생학습타임즈 – 김창엽 gksakel@hanmail.net>

출처 - 평생학습타임즈, 김진규IN칼럼, 특집칼럼, 2018080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