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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평생교육史] 박인주 교수의 '근대 한국 야학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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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평생학습타임즈와 제휴가 되어있는, 경기도평생교육진흥원이 발간하는 웹진 ‘더 more’에 실린 글입니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가 없다. 과거의 시간은 오늘의 할아버지 시간이자, 아버지 시간이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할아버지요, 아버지로 존재한다. 역사와의 대화는 오늘의 나에 대한 정체성을 명확히 하고, 미래로 가는 나에게 방향성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교육을 통한 역사 이해나 연구를 통한 역사 교훈의 발견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오늘의 우리가 역사에서 놓치고 있는 자료나 교훈이 있다면, 이를 찾아 밝혀 오늘의 문제 해결책과 내일의 이정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평생교육 관계자들은 오늘의 평생교육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시작, 전개되어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알아야 하고, 이를 오늘의 문제해결 지혜 주머니로 삼아, 평생교육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고, 미래 평생교육 방향성 정립의 등불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근대 한국 사회교육(1999년 평생교육법 제정 이전 시기를 사회교육 시기로 구분함)의 씨앗인 야학이 근대 한국 사회교육의 핵심 뿌리라는 관점과 애국계몽을 위한 민족교육(국민교육)이란 관점에서 근대 야학이 언제부터, 왜, 누구에 의해,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내용으로 시작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간략히 살피고자 한다. 첫째, 야학은 언제, 누구에 의해 누구를 대상으로 시작되었으며, 둘째, 초기 야학의 전개 양상과 용어 정의, 셋째, 야학의 성격, 넷째, 야학의 사회교육적 의미의 순으로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째, 근대 사회교육의 큰 뿌리인 근대 야학은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 누구를 대상으로 시작되었는가? 한국 야학은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 즉 수직의 신분사회에서 수평의 평등사회로 나아가는 1880년대 개화기에 시작​1)되어 오늘에 이르는 13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신문에 야학의 이름이 최초로 등장한 때는 1898년, 황성신문(1898년 10월 25자, 흥화학교)과 독립신문(1899년11월 4일자, 세천야학교)(노영택, 2010. 천성호, 2009)이나, 신문에 야학이란 어휘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야학은 존재하고, 부분적, 산발적으로 행하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신문에 등장한 흥화학교와 세천야학교가 야학을 시작한 이후 제동소학교, 배영의숙, 조안의숙, 수하동소학교 등, 근대식 학교에서 야학을 실시한다(김형목, 2006). 신문에 등장하는 최초의 두 학교를 좀 더 살펴보면, 흥화학교는 주학보다 야학과에 관심이 많아, 양지과(量地科)는 학생 수가 90명이나 되었고(황성신문, 1898.12.15. 독립신문, 1899.10.11.), 세천야학교는 한양학교로 개명 후 주, 야간을 동시에 개설하였는데, 주학의 학생 수는 12명인데, 야학은 무려 64명이나 되었다(황성신문, 1899.4.22. 독립신문, 1899.11.8.). 이렇게 시작된 야학을 요약하면, 19세기 말 한국사회는 야학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음과 다수의 사립학교들이 야간반을 주간반과 함께 개설하였고,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관료 출신이나 선각한 지도자들에 의해 개설하였다. 그러나 근대 교육의 현실적 실천 대안이었던 야학이 1905년 이전까지는 전국적으로 크게 확산되지는 못하였는데, 이는 사립학교 설립자들이나 학교 설립에 관심이 있던 선교사들까지도 야학보다는 학교 설립에 관심이 많았고, 야학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야학은 설립자, 설립 목적, 교육대상, 교육 내용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할 뿐만 아니라, 야학의 의미와 야학의 시작 시기에 대한 관점도 다를 수 있다.

둘째, 야학이란 용어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아, 근대 교육과 함께 시작한 초기 야학의 전개 양상과 야학의 시기 구분을 통해 용어 정의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로 시작돼 한일합방에 이르는 시기, 즉 개화기 30년은(이광린, 1999) 한민족 최대의 변혁기였다. 이 변혁기에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 건 민중은 자주의식과 자유 민권의식, 자강독립 정신으로 무장하였고, 선각한 지도자나 파워 엘리트들은 교육을 통한 사회변화 추구와 실력양성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으로 민족의 자주권과 주권을 지켜내고자 하였다. 우리나라 교육사의 획기적인 해인 1886년에 근대식 학교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육영공원이 설립되고(이광린, 1999), 이후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이 신지식 보급과 애국계몽 교육운동을 전개하면서, 수많은 학회와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초기 야학은 수많은 사립학교의 부설로 시작되었으나, 사립학교 중 다수가 제도권 정규학교로 성장, 발전함에 따라 일부 사립학교는 광의의 야학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근대 야학은 조선 후기에서 1898년까지 태동하고, 1919년 3.1 독립운동까지 성숙하여, 1931년까지 전성기를 맞으나, 이후 1945년 해방될 때까지 해체의 탄압을 받기도 한다(천성호, 2009).

130년 야학의 역사를 간단히 시대 구분하면, 사회교육의 역사 시대 구분과 유사하게 국체나 정치체제의 변동과 연계하여 개화기, 일제강점기, 미 군정기, 제1공화국 시기, 개발 및 성장기, 민주화 및 민간복지 시기 등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그러하지만, 야학은 외세 간섭과 침략의 개화기에 민족의 자주권 수호와 국민의 자유 민권 신장을 목적으로 시작해 일제 강점기와 8.15 해방을 거치고, 6.25동란과 6,70년대를 관통하면서 ‘야학’이란 이름만 쓴 것이 아니라, 설립 목적, 교육 대상, 교육 내용, 설립 시기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즉, 야학교, 강습소, 여자야학회, 노동야학, 농민 야학, 서당, 직업학교, 직업청소년학교, 새마을학교, 재건학교, 향토학교, 실업학교, 전수학교, 공민학교 등으로 명명하였다. 그래서 역사의 변천과 시대 상황에 따라 다의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야학을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구분하면, 넓은 의미로는 제도권 정규학교가 아닌 야간에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적 행위​2)로 규정할 수 있으나, 좁은 의미로는 문맹 퇴치를 위한 문자 해득 기초교육, 즉 문해교육을 의미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김형목, 2006). 근대 야학은 협의의 단순한 문맹퇴치(文盲退治) 차원이 아닌 교육입국(敎育立國)의 정신으로 관료나 선각한 지도자들에 의해 자주독립과 자유 민권 신장, 부국강병의 애국계몽운동 차원에서 민족교육운동으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다음 호에 계속).

[출처] 평생학습타임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