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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편집국장 김창엽 박사 칼럼-56] 평생교육이 행복에게 말 걸고, 행복을 지어야 할 때
파일 김창엽~1.JPG김창엽~1.JPG
[편집국장 김창엽 박사 칼럼-56]

평생교육이 행복에게 말 걸고, 행복을 지어야 할 때

김창엽(본지 편집국장, 한국평생교육실천연구전략소장)

경제(經濟)는 몇 가지 뜻으로 알려져 있고, 알고 있다. 우선, 사람이 생활을 함에 있어서 필요로 하는 재화나 용역을 생산, 분배, 소비하는 모든 활동을 일컫는다. 다음, 돈이나 시간, 노력을 적게 들이는 일로서 검약(儉約)이라는 말과 연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가 세상과 때를 다스려 사람을 빈곤이나 어려움에서 구한다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줄임말이라는 뜻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고, 알지 못하고 있다. 활동으로서의 경제, 검약으로서의 경제가 경세제민의 세부내용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경세제민이 경제의 본뜻이라면 경제를 연구하는 학문인 경제학 역시 새로운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경제학이 인간의 행복에 대하여 말을 할 수 있는가, 자본의 논리를 대변하는 복잡한 수치가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설계하는 일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자신의 역할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경제가 단순히 개인의 치부에 한정되는 뜻이 아님을 아시아 최초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후생경제학의 대가’, ‘경제학계의 마더 테레사’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아마르티아 센은 ‘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인간의 행복에 말을 거는 경제학”이라는 책을 통해 제시한다. ‘물질적 측면만이 발전의 모습이 아니고, 민주주의와 자유의 확장이 진정한 발전의 목표이며 이 발전은 인간의 자유를 위한 토대’라고 “자유로서의 발전”을 통해 역설한다.


이런 관점을 기반으로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기에 ‘행복경제학’으로 불리는 새로운 경제학적 시도가 등장하였다. ‘행복경제학’의 개척자는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존 F. 헬리웰 명예교수다. 헬리웰은 2012년부터 UN이 후원하는 ‘세계행복보고서’의 발간을 주도해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다. 헬리웰의 행복 경제학에서 제시하는 행복의 6가지 기준은 건강기대수명(얼마나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나), 자유로운 삶의 선택(얼마나 자주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나), 관대성(우리는 이웃과 사회에 얼마나 관용적인가), 부패인식(한 사회가 얼마나 공정하고 깨끗한가), 사회적 지원(내가 어려울 때 나를 도와주는 벗이 있는가), 1인당 국민소득(GDP) 등이다.


헬리웰을 인용하자면 행복은 6가지 행복기준이 적절하게 충족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강제되던 돈과 행복의 일치라는 도식은 단연코 거부된다. 행복은 돈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소득이 행복한 삶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1인당 GDP는 행복의 모든 것이 아니다. 6가지 기준 중 고작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6가지 행복기준을 지금, 여기의 삶과 사회에 대입해 보면 민망한 내용이 도출된다.


첫째, 건강기대수명이 암울하다. 지금도 은연중에 추진되는 의료민영화, 육체적 정신적 피로에 절은 직장생활, 취업을 위해 정신질환 조차 걸릴 시간이 없는 청년층, 세계최악의 나쁜 공기 등이 일상적인 지역에서 오래, 건강하게 살겠다고 하는 것은 망상일 수밖에 없다.


둘째, 자유로운 삶의 선택은 가당치도 않다. 초중고생은 대학진학을 위해, 대학생은 재벌기업 입사를 위해, 직장인은 밀려나지 않기 위해 인간임을 포기하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하고 있다. 청년실업률이 사상 최고치를 뚫고, 사회안전망이 제로에 가까운 상태에서 얼마나 자주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나 또는 자유로운 삶을 선택할 권한이라는 것은 수식어로도 부적절하다.


셋째, 관대성의 존재가 의심스럽다. ‘내가 내 주변에 따뜻하고 관대한 적이 있었나, 내 주변에 사람들이 얼마나 있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성적이 생명이다. 친구를 눌러야 한다’라는 것부터/것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타인에게 따뜻한 관용이 살아남을 수 없다. 이웃과 사회에 얼마나 관용적인가 라는 질문은 길을 잘못 든 손님일 뿐이다.


넷째, 부패인식은 새삼 짚을 필요조차 없다. 한 사회가 얼마나 공정하고 깨끗한가를 짚어보기에 적절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멀리 살피지 않아도 된다. 강원랜드와 공기업의 취업 부정은 오히려 사소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악취가 진동한다. ‘한국은 부패하지 않고 공정한 사회입니다”라고 말하면 소가 웃을 판이다. “다스는 누구겁니까”라는 말이 폭발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다섯째, 사회적 지원이 극히 미흡하다. ‘종이상자 줍는 노인’은 사회가,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실패한 자를 다시 일어서도록 하는 사회적 지원이 없으면서 ‘도전하라’고 청년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무책임의 정도가 아니다. 백세시대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백세시대에 사는 사람이 어려울 때 그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충분한지, 그를 도와주는 벗이 있는가를 살피지도 않는다.


여섯째, 1인당 국민소득(GDP)은 겉보기에 그럴 듯하다. 조만간 3만 달러에 도달한다고 하니 일견 크게 부족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속내는 전혀 다르다. 1년에 몇천억 원의 소득을 올리는 사람과 일이천만 원의 소득을 올리는 사람의 소득을 합쳐서 평균을 내면 몇천억 원이 된다. 경제적 풍요로움을 실감하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대다수의 사람은 빈곤을 천형처럼 안고 산다. 비교할 수 없는 소득을 올리는 사람의 수입 경로는 부정적인 경우가 허다하다. 극심한 소득격차가 엄존한다. 이 소득격차는 세습되기조차 한다.


헬리웰은 6가지 행복 기준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회적 지원’을 꼽는다. ‘내가 어려울 때 과연 나를 도와주고 돌봐줄 벗이 있느냐’는 것을 인간 사회의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꼽고 있다. 톺아보면, 이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내가 아플 때, 내가 고통스러울 때, 내 가족이 가난할 때, 내 마음이 어지러울 때, 누군가가 내 앞에 나타나 나를 위로하고 나를 도와주는 사회가 있고, 내가 그 사회에 산다면 나는 행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는 숨쉬는 공기처럼 내 옆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그러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두루 애써서 만들어야 한다. 이제 경제학이 이러한 6가지 행복기준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답을 해야 한다.


같은 맥락의 대답을 평생교육에 요구할 수 있다. 평생교육이 ‘완전한 인간’과 ‘대안적 사회’를 추구한다면, 평생교육을 연구하는 학문인 평생교육학 역시 인간의 행복과 인간 존재에 대한 새로운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평생교육학이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인간의 행복에 대하여 말을 할 수 있는가’, ‘자본의 논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설계하는 일을 할 수 있는가 또는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스스로 묻고 사람들에게 답해야 한다. 평생교육이 경쟁력, 인적자원개발, 4차산업혁명과 코딩 이야기만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까닭이다. 지금의 삶과 사회와 역사 속에 함께 사는 사람들의 행복에게 말을 걸어야 할 때가 됐다. 모두의 행복을 지어야 할 때이다. 미루지 말아야 한다.

출처-평생학습타임즈, 칼럼, 특집칼럼, 20171220일자